홈 > 열린마당 > 민속이야기   
   
 

<만묵당 문집> 책판 - 선조 말씀 전하는 ‘인쇄틀’

관리자홈페이지

 



만묵당(晩默堂)이라는 호(號)의 주인공은 이경무(李景茂)라는 사람이랍니다. 조선 시대 임진왜란 끝나고 광해군 시절(1609년) 태어나 숙종 때(1679년) 숨을 거뒀는데 족보에는 동당시(東堂試=문과)에서 장원을 했다고 돼 있습니다. 나름대로 학문이 있었던 모양인데 벼슬을 한 자취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경무는 늘그막에 냇가에다 정자를 지었는데 그 이름이 만묵당이라 하는군요. 여기에서 그이는 유학-의리를 공부했다는데 <양묵홍수론(楊默洪水論)>이라는 책을 지은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함주지(咸州誌)> 129쪽은 그이에 대해 “문장과 덕행을 아울러 아름다운 이름이 세상에 떨쳤다. 똥을 맛보고(嘗糞) 시묘(居廬)살이를 했을 정도로 하늘이 낸 효자다. 여양서원에 배향됐다”고 적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함안이라고 하는 함주에서는 알아주는 인물이었던 셈입니다.

여기 있는 <만묵당 문집> 책판은 그러니까 만묵당이 생전에 쓴 글들을 모아 대대손손 전해지게 한 것이랍니다. 책판은 인쇄 도구인 셈인데 여기에 먹을 묻힌 다음 한지에다 찍어냅니다. 책판은 피나무 산벚나무 등을 재료 삼아 글자판을 짜고 거꾸로 글자를 새겨 넣는답니다.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문집의 성격입니다. 오늘날은 교육의 대부분이 학교라는 공공 기관에서 이뤄지지만 그리고 사교육이라 해도 집 바깥에서 하게 되지요. 하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기본 교육은 서당이나 서원이 아니라 집안에서 대부분 하고 자라서 집밖에서 한다 해도 집안 교육은 나름대로 중요성을 띠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양반 가문에서는 자기네 조상들이 이룩했던 학문을 이렇게 책으로 엮어내어 알 수 있도록 했는데 이것은 당시 풍토에서는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게다가 당시 학문이 지금처럼 어떤 객관적인 지식이나 실용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았던 점도 크게 작용을 합니다. 말하자면 의리(義理)라든지 하는 인간 사회의 원칙과 이기(理氣)라든지 하는 우주의 원리를 따지고 나아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근본과 방법이 당시 학문의 초점이었기 때문에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학문의 흐름이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띠었고 또 집안에서 충분히 감당할 수도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집안에다 책판을 두고 조상의 문집을 찍어낼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문제점도 없지 않습니다. 가문을 빛내자는 취지에서 선조 행적을 미화할 뿐 아니라 위조까지 합니다. 정부 실록 같은 공식 기록에는 없는 행적이 이 같은 문집에 보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특히 전쟁 관련 기록의 경우 황당한 내용이 적혀 있기도 합니다.(물론 만묵당 문집이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가문의 문집을 오늘날 되살려 쓰려면 정밀한 고증이 앞설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문집 책판은 집안에서 쓰임새를 잃고 이렇게 민속박물관 한 쪽 자리를 차지하게 됐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에는 조상이 궁구(窮究)한 바는 어떻게 전해져야 할까요? 옛날 문집처럼 일기를 남기는 수도 있고 나름대로 뜻이 있거나 뛰어난 이는 책을 남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네 보통 사람이 따라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옛날에는 사서삼경 같은 고전만이 공부하는 이들의 책장에 꽂혔지만 요즘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즐겨 읽고 큰 교훈을 얻은 책-누렇게 빛이 바래고 손때가 꼬질꼬질 묻은-을 물려주는 것도 가풍과 지적 전통을 이어나가는 한 방법이 되지 않을까, 어설프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