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시, 서울의 중류 수준 사람들이 쓰는 말인 이른바 표준말로는 ‘구유’라고 하는 이것은 주로 나무로 만들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소나 말 돼지에게 먹이를 담아주는 통입니다. 외양간이나 우리에 갖다 놓고 꼴이나 여물을 담아주면 짐승들이 여기다 주둥이를 갖다 댑니다.

나무구유와 돌구유가 있는데 아무래도 나무가 많이 쓰였지요. 기다란 통나무 가운데에 홈을 파고, 양끝에 턱을 내고 붙박이 자리를 만들면 됩니다.

꼴은 말하자면 날로 먹이는 풀이나 나뭇잎 따위를 일컫고 여물은 짚이나 풀을 말려서 썬 마소의 먹이를 일컫습니다. 풀이 싱싱하게 자라나는 봄·여름·가을에는 여기에다 꼴을 채웠고 주로 늦가을부터 겨울을 지나 이른봄까지는 이 구시를 여물로 채웠습니다. 물론 돼지구시 같으면 이런저런 돼지죽으로 채웠겠고요.

어쨌거나 여기 있는 이놈은 소구시입니다. 소여물은 주로 짚을 썰어서 만들었습니다. 가을걷이를 하고 빈 들에 가득 자빠져 있던 짚단을 알맞게 나눠 작두로 써는 일은 주로 꼴머슴이나 집안 아이들이 했습니다. 짚단을 재우는 사람이 하나 필요하고 작두날을 손이나 발로 내리누르는 사람이 또 하나 있어야 했습니다. 짚단을 잘못 먹이면 내리누르는 작두날에 손가락이 달아날 위험도 없지 않았습니다. 옛날에는 꼭 이렇게 해서 손가락이나 손목이 달아난 이가 마을마다 하나 정도는 꼭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이 짚단에다 ‘딩기’라고(서울말로는 등겨 또는 왕겨), 탈곡한 나락 껍질을 집어넣습니다. 나락 껍질은 쌀가루가 묻어 있게 마련이었으므로 영양가가 많았습니다. 어떤 때는 콩깍지를 섞기도 했고 진짜 드물게는 콩을 먹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소한테 살이 토실토실 오르겠지요.

이를 사랑방 아궁이에 걸린 가마솥에 집어넣고 물을 부어 고루 섞은 다음 불을 지펴서 푹 익힙니다. 옛날 나이 드신 할아버지들의 으뜸 가는 새벽 일거리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고구마나 밤 따위를 짚불에 넣었다가 꺼내어 뒤늦게 눈비비고 일어난 손주 녀석 군것질거리로 장만해 주시곤 했지요.

김이 술술 나면서 구수한 냄새를 사방으로 풍기면 이것들을 커다란 나무통에 옮겨담습니다. 그 때 이 자루바가지를 쓰지요. 자루가 달려서 자루바가지라 하는데 이 놈도 마찬가지 나무로 만들어 튼튼했습니다. 자루가 달린 까닭은 여물을 떠 담을 때 너무 뜨겁지 말라고 그런 것입니다.

이 놈을 들고 외양간으로 가면 벌써부터 냄새를 맡고 코를 벌름거리던 소들은 우우 일어나 목에 건 방울을 딸랑거리며 나와 반깁니다. 여물통, 그러니까 구시에 여물을 쏟아부으면 뜨겁지도 않은지 곧바로 대가리를 처박고 새김질을 합니다. 이를 쳐다보는 어른들 눈가에는 가늘게 웃음 주름살이 집니다.

이 같은 구시는 언제부터 있었을까요? 아득한 옛날부터 있었겠지만 확인되기는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와 가야가 나란히 있던 1600～1700년 전입니다. 357년 지어진 고구려 고분 동수묘(冬壽墓) 벽화의 외양간 풍경에서 구유를 볼 수 있답니다. 또 백제 주거지로 짐작되는 전남 무안 양장리(良將里)에서 구유가 실제 발굴되기도 했답니다.